천불석탑

2023. 6. 13. 04:19카테고리 없음

운주사 석불

산은 제법  웅장하고 험준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위압할 정도는 아니었다. 험준한 고개를 몇개넘어 능주현에 도착한것은 점심때가 지나서 였다. 고적한 뻐꾸기 울음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돌 쪼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불석탑을 깎는다는 스님이 내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산이 질박한 것처럼 절도 대웅전 하나에 요사체 하나만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대웅전이 저물어가는 하늘응 떠 받치듯이 머리를 처들고 있었다. 
스님 스님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선 일행이 몇번 스님을 불러 보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지함 일행은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쓸쓸한 향내가 가득한 법당엔 자그마한 미륵불 한 좌가 고적한 어둠을 지키고 있었다. 
무심코 미륵불을 쳐다보던 지함은 이상한 생각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 보았다
여느 사찰에서는 볼수없는 특이한 불상이었다.
가사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가사는 미륵불이 깔고 앉은 범종위에 걸쳐 있었다.  
자비가 철철 넘치는 다른 불상들과 달리 얼굴은 반쯤 찡그리고 있었고 그 얼굴 가득 세상사 번뇌를 담고 있었다. 
선생님 미륵불인것 같은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처음보는 형상인데요.
흠 그렇군.
열린 문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미륵불의 고뇌에 찬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는 바람에 미륵의 고통이 더 선연히 드러났다.
언젠가 이 불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예서 만나게 되는구먼. 내 기억에 틀리지 않는다면 이건 신라때 만들어진 금동미륵반가유상일세. 
석가불 다음에 세상에 나타나 도탄에 빠진 중상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이지.
미륵불은 세상을 구제 하겠다는 크나큰 뜻을 품고 이세상에 내려왔지만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네. 
내가 미륵불이다 하면서 도탄에서 구해주려 했더니 외려 중들은 미륵불을 알아보지 못하고 달려들어 죽이려 한 것일세.
그러나 미륵불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거지.  
그래 화가치민 미륵불은 온갖절에서 아침저녁으로 자기를 불러내던 범종을 종각에서 끌어내렸다네. 
그리고는 미륵의 형상인 가사를 벗어 종위에 얹어 놓고 그위에 다라를 꼬고 올라 앉았지. 도대체 이 불쌍한 중생들을 어찌 구제해야 하나?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것이 바로 미륵불상일세.
 어떤가? 신라적 조상들의 상상력도 상상력 이지만 그 생각의 깊이가 천길 만길 깊지 않은가? 
타락한 불교를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수있게 꼬집을수 있다니 가히 놀라운 기지일세.
성리학자인 화담은 지금껒 단한번도 불상에 절을 하거나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화담은 정중하게 옷깃을 여미고 향통에서 길가란 향을  세개뽑아 불을 붙인뒤 허리를 굽혀 세번 예를 올리고 향로에 꽂았다. 
지함도 화담을 따라 진한 애정으로 절을 올렸다. 
도가 통하지 않는 세상, 구원을 거부하는 중생을 포기하지 않고 미륵은 깊은 고뇌로 새로운 길을 찾고 있었다. 
중생이 거부하는 도란 이미 도가 아닌 것을 미륵불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세상의 도를 얻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를 찾아 고뇌하는 모습,무릇 도를 찾는 이의 자세란 이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 점심때 만난 젊은 농부의 불통스런 말이 떠올랐다. 
그는 화담이 수십년간 닦은 도를 말하자 단 한마디로 깔아뭉개 버렸다. 
모든 氣는 한 뿌리이며 평등한 것이라는 화담의 말이 하루하루 차별을 느끼고 살아가는 그 젊은이에겐 한낱 한가한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님도 굶어 보시오.
이말로써 그 사내는 화담을 비웃기까지 하였다.  
서쪽으로 해가 기울고 돌쪼는 소리가 멎었다. 
산사에 휴식이 찾아온 것이다. 
잠시후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늙은 중이 내려왔다. 
노승의 얼굴이 또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돌을 깎기엔 너무 연로해 보이는 중이었다. 
노승을 마주한 지함은 저도 모르게 두손을 모아 합장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겸허의 마음이 우러나게 하는 위엄이 서린 얼굴이었다. 
지나던 길손이온데 하룻밤 묵기를 청하고자 합니다.
노스님 역시 조용히 두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리고 어깨에 멘 무거운 연장들을 조심스레 내려 놓았다.
법당에서 나오던 화담이
아니 이게 뉘시오? 老僧은 천천히 화담을 돌아 보았다. 
화담 선생이시군요. 우리 인연은 정말 질긴가 보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안으로 드시지요.
뉘신데 선생님이 저렇게 놀라십니까?하고 지함이 박지화에게 물었다.
지족선사일세.
예? 작년에 송도에서 사라졌다는 그 지족선사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참 세상은 넓고도 좁구먼 그래.
황진이 때문에 삼십년 공든탑을 무너뜨리고 송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지족이 이곳 운주사까지 와서 천불 석탑을 조성하고 있을줄이야...
선비님들도 안으로 드시지요.  하고 지족은 법당으로 이끌었다.
땅은 넓어도 죄인이 도망칠 곳은 없다더니 세속말이 다 일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지족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름없는 석공으로 새 도를 쌓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지족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다시 만나게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손님치고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겠군요.
허허허 하고 화담이 웃었다.
아니요. 오히려 고마운 손님이올시다. 
다른 사람은 나를 비추어 볼수있는 거울이지요. 
손님들을 통해 내가 과연 지족을 버리는데 성공했는지 확인 할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여러분은 부처의 현신인 셈이지요.  
지족은 과거의 지족이 아니었다.
천불석탑을 쌓는 거대한 포부를 세운 석공으로써 그들 앞에 선 것이다. 
그나저나 시장하실텐데 하며 지족은 조그만 부엌으로 내려섰다. 두 선비가 따라 가려니까 굳이 못오게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