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길에서 만난 여인

2023. 6. 11. 13:12카테고리 없음

여자는 요물

겨우 눈을 떴다. 아직은 살아 있었다.
사물은 모두 부옇거나 서너 개씩 흔들려 보였지만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과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형체도 또렷하게 보여지진 않았다. 촉수 밝은 전등이며 제법
실내장식이 호사스러운 곳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
  목이 타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것 같아 두어 차례 마실 물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입안에 물기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몸 안에 습기조차 없는 느낌이었다. 딱 한 방울의 물만 먹었으면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물을 달라나 봐요."
또르르 구르는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사내가 뭐라고 대꾸를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자꾸 가리키기만 했다.
"줄까요?"
계집애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내가 또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환한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뭉뚝한 구둣발이 내 머리통을 질끈 밟았다.
"물......"
"살고 싶으냐?"
"물......"
"살고 싶냐니까?"
목청이 되바라졌다.
"물......"
사내가 다시 내 옆구리를 발길로 밀어젖혀 놓았다. 그러고는 주전자째 사정없이 부어 버렸다. 
입을 딱 벌리고 정신없이 마셨다.
달고도 달았다. 이렇게 기막히게 맛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머리칼과 옷이 다 젖도록 주전자물을 쏟아 버린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씨익 웃었다.
낯선 사내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상하체가 고루 발달한 것으로 미루어 힘깨나 써 보이는 사내 같았다. 

정신이 좀 들었다. 사내 얼굴도 바로 보였고 사물도 밝게 보였다. 

골이 쑤시고 어찔어찔한 것이 독한 약을 먹었다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어서거나 움직일 힘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찍어누르는 것 같았다.
"너는 누구냐?"
겨우 목청이 트여 누운 채 이렇게 물었다.
"네놈이 장총찬이냐?"
사내가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
"네가 장총찬이면 나는 장칼찬이다."
"왜 나를 잡아왔냐? 너하곤 원수진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저승에서 왔지."
사내는 이렇게 말해 놓고 저 혼자 웃었다.
"나를 함부로 건드렸다간 후회한다. 느이 두목이 누군지 모르지만 내가 보잔다고 해라. 조무래기는 상대하기 싫으니까."
"으흐흐흐흐......"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공갈도 통할 곳이 따로 있다. 널 살려둔 건 이뻐서가 아니라 아직은 써먹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내가 옆에서 이렇게 거들었다.
아까 상대했던 사내에 비해 왜소한 체구인데 태도로 보아 꽤 높은 자리인 것 같았다. 

검정양복에 하얀 와이셔츠와 하늘빛 넥타이가 사내의 차가운 인상과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계집애가 얼른 수건을 내밀었다. 무릎이 보일 만큼 짧은 치마와 길고 윤기 도는 목이 시원하게 보이는 계집애였다. 서글서글한 눈매며 화장기 없는 밝은 모습으로 미루어 앳된 계집애인 것 같았다.
"그럼 살려둔 이유를 알자."
"이봐, 죽는 것도 내 성질이니까 딴소리 말고 얘기 좀 하자."
나는 바락바락 대드는 것처럼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이 죽이기로 작정을 했다면 이렇게 살려놓고 따질 까닭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들에겐 나를 살려두어야 할 곡절이 있는 게 분명했다.
고분고분하다고 살려둘 위인들이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내가 죽고 사는 일은 전적으로 그들의 소관이었다.
"침착해라. 알려 줄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해 주겠느냐."
그러고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눈을 떴다니까 확인하러 내려온 것 같았다.
이들이 누구이며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말하겠지만 그때까지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덩치 큰 사내는 담배를 연신 피우고 있었다. 힘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사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내게 어떤 약물을 투여했는지 그럴 힘이 없었다.
한참만에 사내들이 우르르 내려와 내 눈까풀도 뒤집어 보고 독화살 맞은 자리도 살펴보더니 두 손을 뒤로 묶어 버렸다.
느슨하게 묶었지만 매듭을 단단히 조여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뭘 좀 먹여라."
검정 양복의 사내가 말했다.
"이봐, 쬐꼬만 친구. 나랑 얘기 좀 하자."
나는 내친 김이어서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네 성질 모르는 건 아니다만 내 앞에서까지 까불면 금방 후회한다. 알았냐?"
"네가 누군데?"
"허헛!"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덩치 큰 사내가 등짝을 걷어찼다.
나는 앞으로 고꾸라져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내 스스로 혈을 짚어 고통을 면케 했고, 뼈를 이단시켰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디가 부러져도 부러졌을 강타였다.
"내 몸에 손댄 놈은 반드시 처절하게 후회하게 될 거다."
"아직도 입은 살았구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사내가 어깻죽지를 무섭게 내리쳤다. 나는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할 말이 남았냐?"   검정 양복 사내가 차갑게 물었다.
"이봐, 날 함부로 다루지 마라. 네놈도 이렇게 대하는 날엔 끝장이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구나. 얘들아, 저 성질 좀 눕혀 봐라."
사내가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자 둘러섰던 사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정없이 나를 걷어차고 짓밟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가 꼼짝 못하게 묶여져서 사정없이 얻어맞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구 다루더니 방안으로 끌고 가 침대 위에 내팽개치고 나갔다. 

한심한 생각뿐이었다. 말이 통하는 녀석도 없었고 말대꾸하는 녀석도 없었다.
알겠지만 나 같은 사내는 설 건드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다잡을 상대가 있고, 구슬러댈 상대가 따로 있는 법인데 나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으로 미루어 나를 잘 아는 녀석들은 아닌 것 같았다.
계집애가 밥상을 들고 들어와 내 옆에 얌전하게 앉았다.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며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식사를 하세요. 이럴수록......"
"이런 꼴로 하란 말요?"
"제가 먹여 드릴게요."
"그래도 괜찮겠소?"
"제 임무예요."
"운동을 시켜 줘서 밥맛은 나겠소.
그나저나 오늘이 며칠이오?"
"내쳐 잤단 말요?"
"헛소리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러시길래 깊이 잠든 것 같지는 않았어요."
계집애는 계속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생김새가 곱고 착하게는 생겼는데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린깜양엔 다부진 눈빛이었다.
"내 몸에 이상한 자국이 많은데......"
"영양제를 놓았어요."
"내 몸에 말이오?"
"제가 직접 꽂았으니까요."
"다른 걸 투입하진 않았소?"
"예."
대답이 시원찮았다. 왈칵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쉽게 대꾸할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맞은 독이 어떤 종류요?"
"그건 저도 몰라요."
"그럼 영양제 말고 다른 건......"
"전 몰라요. 그 이상 물어봤자 제가 아는게 없어요. 그리고 한가지 부탁을 하고 싶어요."
"말해요."
"대항하지 마세요. 대항하면 죽어요."
"죽는 건 내 일이오."
"그렇지만 아깝잖아요."
"어떻게 하면 살겠소?"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기만 해요."
"명심은 하겠소.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사는 놈이오. 죽이면 죽는 수밖에 없지만......"
"현명했으면 좋겠어요."
"그건 안 돼요."
매몰차게 잘라말했다. 나를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이리라. 계집애는 정성스럽게 죽을 떠먹여 주었다. 

팔을 뒤로 묶인 상황이어서 염치 없이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죽사발을 더 시켜 먹었다.
그렇다고 정신이 맑아지거나 힘이 솟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버는 방법이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
"할 얘기는 아니지만 내 손을 풀어 줄 수 없소?"
불가능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 계집애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슬쩍 던져본 말이었다.
"난 살고 싶어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럴 때의 계집애 모습은 냉랭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기대를 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도망갈 수 있게 안내를 해 주거나 특별한 방법으로 도와 주기 전에는 붙잡히기 마련이었다.
나를 잡아다 놓고 그렇게 만만하게 다룰 위인들도 아닐 터이며 지금 힘으로는 그들과 대적하기는 불가한 일이었다.
그들도 그만한 것을 염두에 두고 나를 다룰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녁 무렵까지 나는 엎드리거나 앉은 자세로 계집애가 시중드는 대로 요기를 하거나 말동무가 되어 지내게 되었다.
재잘재잘 말도 잘하고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는 계집애인데 내 눈치가 조금만 이상해지면 긴장하거나 비상 연락용으로 매달아 놓은 줄 근처로 잽싸게 자리를 옮기곤 했다.
가더라도 너한테 얻어먹은 신세는 갚아야지. 안 그래."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전 제 임무기 때문에 옆에 있는 것이지 도와 드리기 위해 있는 게 아녜요."
계집애는 솔직하게 말했다. 말하자면 나를 감시하는 역할이란 뜻을 분명히 했다.
나이가 어려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게 되었는데 계집애는 스스럼없이 나를 대했다.
"이름은 알려 줄 수 있잖아."
"한설희예요."
"이름은 괜찮다. 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보니 남의 사주팔자를 좀 볼 줄 알지."
"복채 얼마 드릴까요?"
어린 계집애였다. 자신이 감시자라는 것을 알면서 내가 사주팔자를 짚고 육갑도 한다니까 호기심을 발동한 것이었다.
자신의 미래를 누군가가 말해 준다는 것은 기묘한 호기심이 유발되는 것인지 모른다.
하긴 불확힐한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인간의 심성인지 모른다.
"밥먹여 준 걸로 복채는 까고 나중에 우연히 만나게 되면 그때 차 한 잔 사라."
"좋아요. 그러나 외상으로 보면 복이 달아난다니까 우선 이거라도 받으세요."
그러면서 동전 몇 개를 바지주머니에 억지로 넣어 주었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주머니가 다 털리고 표창까지도 남김 없이 빼앗긴 상태, 허리띠도 풀어 빼갔고 양말까지 벗겨내어 움치고 뛸 생각조차 넣어 주는 계집애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너무 순진한 나머지 복채를 외상으로 하면 안 된다는 말을 기억하고 그러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동전은 소리가 나니까...... 이왕 복채를 주려거든 주머니마다 나누어 넣어 줄래?"
"복채가 적어 그래요?"
"그게 아니고 이렇게 붙잡혀 있는 놈이 주머니마다 동전이라도 있다 싶으면 마음이 편할 거 아니냐."
"그러죠 머."
계집애는 동전을 나누어 내 주머니마다 넣어 주었다. 급할 때는 표창 대신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눈치 챌 리 없을 것이다.
유용하게 쓰셨으면 해요."
뭘 안다는 신호 같기도 했다. 나는 한설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녀는 얼른 눈빛을 피했다.
"귀하게 자랄 팔자였는데 도중에 운이 바뀌었다. 부모와는 일찍 헤어질 수고, 귀가 여려서 남 말 듣다 신세 망칠 운세다.
앞으로 고비가 세 번 더 남았는데 스물 세살과 스물 일곱 그리고 서른 아홉을 조심해야겠다. 네가 꼭 하고 싶은게 있는데 앞길이 평탄치만은 않을 거다."
"맞아요.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아세요?"
"시를 쓰고 싶겠지."
"그래요, 시인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
"정말 그래요, 어쩌면......"
"한가지 더 말해 주지. 공덕을 쌓아야만
네 일생이 편하다."
"어떤 게 공덕이에요?"
"남한테 베푸는 일이다. 가난하고 없이 사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되고,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이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도와라. 그렇지 않으면 넌 네가 원하는 인간이 못 된다."
"스물 세 살엔 어떤 고비일까요?"
"나처럼 겉이 멀쩡한 늑대를 조심해라.
결혼은 절대로 일찍 하면 안 된다."
"아저씨 같은 늑대라면 조심하고 싶지 않아요. 스물 일곱 살은요?"
"죽을 수가 끼여 있다. 운방살이라는 건데 음력으로 구시월을 꼭 조심해라."
꿈이 많아요."
"안다. 학교도 세우고, 고아원도 해야겠고 큰 목장도 만들고 싶고 ......"
"맞아요, 정말 귀신인가 봐요. 이를 어쩌죠?"
계집애는 계속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짚어나가는 것이 신통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두 눈이 커진 것이었다. 

내가 남의 미래를 내다보는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이만큼 설희의 의중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생김새며 말하는 투며 내게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그냥 느낀 대로 던진것인데 설희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렇게 용한데 왜 이런 일을 당할 줄 몰랐어요?"
"사람에겐 운명이란 게 있다. 잡힐 줄 죽는다든지...... 그런 일이 생기기 때문에 일부러 피하지 않고 당해 주는 거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요!"
"알지."
"어떻게 되요?"
"네가 날 몰래 도와 줄 거고, 나도 저 친구들을 다 때려잡고 만다. 그렇게 맞았는데도 멀쩡하잖니? 그게 다 운명이란다. 

두고 봐라. 너랑 나랑 웃으면서 차를 마시게 될 거다."
"......"
설희는 대꾸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알았으리라. 지금 내가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나를 도와 줄 수 없는 처지이지만 내 말에 마음이 약해졌거나 갈등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