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9. 20:09ㆍ카테고리 없음
어느덧 일행은 전라도 해남땅의 땅끝에 도착하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가슴 졸이며 떠올랐던 태양은 순식간에 온 천하를 붉은 빛으로 장엄하게 물들이더니 바다 속으로 허망하게 가라 앉았다.
저기 저 마을을 보십시요. 음기가 무척 세군요. 그의 말대로 양기라고는 전혀없어 보이는 땅이 눈아래 자리잡고 있었다.
지형이 흡사 여자의 음부 같았다.
불두덩처럼 둥글고 밋밋한 산이 둘러서 있고 그 한가운데 조그만 산이 음핵처럼 돌출돼 있었다.
그 음핵의 바로 아래에 오십여호쯤되는 마을이 깃들여 있었다.
오늘밤은 저기서 머물러야겠네.
어차피 더멀리는 가지 못할테고...
앞장선 화담을 따라 일행은 관음산을 내려갔다.
황혼이 나그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을은 위에서 내려다 보기와는 다르게 꽤 넓게 터를 잡고 있었다.
바다를 지척에 둔 어촌치고는 땅이 꽤 넉넉했다.
논일을 마친 장정들이 연장을 둘러메고 돌아갈만한 때이건만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아낙네만 띄엄띄엄 보일뿐 남자들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물길이 좋아 남정네들은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것일까.
싸릿대 울 너머로 슬쩍 집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역시 저녁 준비에 바쁜 여인네 뿐이었다.
저기 사내가 있긴 있군.
손끝에 가리키는 곳에 여닐곱살 먹은 사내애 서넛이 논둑길로 소를 몰아오고 있었다. 일행은 주막을 찾았다.
마침 한 아낙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막이 어디 있습니까?
급히 멈춰서는 바람에 물동이가 찰랑거려 물방울이 여인의 옷고름을 적셨다.
부끄러움 없이 지함 일행을 뚫어지게 처다보는 아낙의 눈빛은 이상하게 번들 거렸다.
여기서 묵으실라고요?
그렇습니다.
왔던길로 쪼매 돌아가셔야 쓰것는데요. 오른편으로 자그마한 길이있는데 글로 가보시씨요.
말을 마친 아낙은 휭하니 찬바람을 휙하고 일으키며 사라졌다.
여인의 묘한 눈빛에 마음에 남았다.
여인의 말대로 조금 돌아가 오른쪽으로 꺾어지자 허름한 주막이 나타났다.
서툴게 주막이라고 써놓은 등이 걸려 있으니 주막인가 보다 했으나 여염집과 별로 다를배 없었다.
찾는이가 별로 없는지 사람의 기척도 없이 썰렁했다.
인기척을 내자 밖은 내다보는 주모는 백발에 허리굽은 노파였다.
하기사 이런 마을이야 나그네의 발길도 뜸할테고 바닷가라고는 하나 십리는 떨어져 있을테니 이마을 사람들 외에 어부들의 발길이 닿을리도 없었다.
주막이 맞긴 맞나본데 너무 썰렁합니다 그려.
손님 든것이 서너달은 됐는갑소. 객주집이야 객이 있어야 번창하는 것인디 객이 없응게 그렇지라.
그런데 주모. 이 마을에는 남정네들이 통 보이질 않는구려.
긍께 과부촌이라 안흐요. 그걸 모르는걸 봉께 먼디서 온 손님인게비요이.
이 마실 남정네들이 바다만 나갔다하면 영영 돌아올 생각을 안허요. 그래 이 동네 사람들은 철이 들만허면 다 타관으로 떠나뿌요.
남은 사람은 다릿새에 달린게 읎는 계집들하고 불알이 들여문 아그들 뿐이그마요.
음기가 센 지형이긴 했지만 설마 남정네의 씨가 마를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물은 찌그 우물서 떠드시고 쪼까 기다리씨요이.
백발의 주모는 굽은 허리로 다람쥐보다 잽싸게 사립을 빠져 나갔다.
오랫동안 손님을 치르지 않은 주막이니 상 차릴 준비를 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은 자주 쓰지 않았는지 흙먼지를 뿌옇게 뒤집어 쓰고 있었다. 평상위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낸 지함 일행는 그위에 앉았다.
바다 내음을 실은 초여름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왔다.
부억 뒷문과 뒷쪽 사랍문을 드나드는 인기척이 부산했다.
저녁 준비를 하는 발걸음인듯 했다. 단 세 사람의 손님을 맞기위한 준비치고는 너무 소란스럽다 싶었다.
주모가 부엌문 틈으로 쭈그러진 얼굴을 내밀고
일단 찌그 앞방으로 드씨요. 손님은 없어도 혹 몰라 씨방만은 깔끔하게 치워 뇄응께.
세사람은 주모가 가리키는 방에 들어 짐을 풀었다.
어이 지함 우리 나가서 등멱이나 하지 않을려나. 주모는 저녁 준비에 바쁠테니 이틈에 땀좀 씻자구.
거 좋지요.
지함과 박지화는 마당가 우물로 나갔다. 우물은 아득하게 깊었다. 한두레박을 길어 올리는데도 팔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깊었다.
깊은 만큼 물은 맑고 시원 했다.
이거 물도 온통 음기를 뒤집어쓰고 있구만. 이가 다 시리네 그려.
하며 박지화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지함이 물을 퍼 올리는 동안 박지화는 웃통을 벗고 엎드렸다.
지함은 길어 올린 물을 지화의 등판에 쏟아 부었다.
옷 차거. 거 참 시원타.
박지화는 깊은 우물물을 뒤짚어 쓰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빠꼼히 열린 부엌문새로 까만 눈동자들이 두 선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을 끼얹을 때마다 진저리치는 모양을 보고는 그녀들은 끼들끼들 숨죽여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두사람이 등멱을 마치고 웃도리를 걸칠때 주모가 개다리 소반에 술상을 차려 문지방을 넘고 있었다. 지함이 마주 보고 이리 주시요. 주모는 며느리나 딸도 없소.
상을 들기엔 연세가 너무 많으신것 같소이다.
주모는 토기눈을 하고 지함을 바라보았다.
허기사 버젖한 양반차림의 선비가 상을 받아 들겠다는게 놀라운 일이었다.
남자가 부엌만 들여다 보아도 팔푼이 소리를 듣는 세상인데...
식사는 쪼깨 기달려야 쓰것소.
술이면 됐소. 힘드실텐데 천천히 준비 하시오.
부엌에서는 연신 낮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따금 간드러지는 웃은소리도 섞여 나왔다.
얼마만에 주모가 시방 상을 들여도 되것씁니까.
때가 늦어서 시장들 하실텐데...
주모 뒤에는 젊은 여인네 둘이 푸짐하게 차린상을 들고 서 있었다.두여인은 주모가 열어준 문으로 상을 들여 놓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상차림이 그야말로 산해진미였다. 온갖생선에 갖가지 나물,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쇠고기까지 올라 있었다.
정성껒 차리긴 했는디 입맛에 맞으실란가 모르것소이.
아이고 나랏님도 부럽지 않구만 그래, 어쨌든 고맙게 잘 먹겠소이다.
글먼, 맛나게 잘 드시씨요이.
상차림이 과하다 싶어 부담스러웠지만 보름동안 허기졌던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화담은 난 생각이 없으니 자네들이나 들게 하며 밖으로 나갔다.
두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나자 그동안 먼길에 지친 몸이 노곤하게 가라앉았다.
저녁상을 치우면 자야지 하고 있는데 주모가 샐쭉 얼굴을 내밀었다.
주모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들어온 여인들이 상을 내간 후에도 주모는 방문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저, 방을 께깻이 치워놨는디라.상물린 방을 치울라면 시간이 걸릴텡께 딴방으로 옮기는거시 좋것그만요.
그럴것 없소이다.
지함이 괜찮다고 말했으나 주모는 막무가내로 방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별수없이 두사람은 짐을 들고 주모를 따라 나섰다.
어르신께서 돌아 오시면 이방을 쓰시라 하시고 두분은 지를 따라 오시씨요.
아니 우리 모두 한방을 써도 괜찮습니다. 박지화는 주모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사 쓰간디요. 방도 작은디 어르신께서는 여그서 편히 쉬시는게 좋구만이라. 두분도 따로따로 주무셔야 피로가 깨깟이 풀리지라.
주모는 이웃한 별채로 두사람을 안내했다.
자 여기로 이분이.
주모는 그방에 박지화가 들게 했다. 그리고 지함에게 다른 방을 주었다.
우리까지 각방을 쓸게 뭐요? 번거롭기만 하지.우리 같이 있겠소.
지함이 극구사양했지만 주모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벌써 뒷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주모 이렇게까지 잘 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숙박비도 넉넉지못한 떠돌이 객인데...
아따 선비님도 무신 말씸을 고래 정떨어지게 하신다요?
돈더 받아 묵을라고 그런다면 천벌이 내릴 것이그만요.
성의니께 맴 놓시씨요.
지함이 떠밀리다시피 방안에 들어서자 벌써 깨끗한 침상이 곱게 깔려있었다.
손님도 없는 주막이라더니 어느 주막에 비길데 없이 정갈했다.
신혼방같은 화사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문풍지로 젖빛 달빛이 흘러들었다.
스르르, 기분좋게 눈이 감겼다. 가벼운 솜이불이 달빛처럼 지함의 몸을 다독였다. 지함은 아득하고 평온한 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였다.
방문이 후다닥 열렸다. 잠결에 지함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