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4. 09:51ㆍ카테고리 없음
“모르겠사옵니다.
비단옷을 입은 사람인데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손님을 뵙자고 청하옵니다.”
하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비단옷을 입고 나를 찾아왔다고?”
자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기된 표정으로 황급히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누구도 찾아주는 이 없는 처소에 비단옷을 입은 귀인이 찾아왔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간절히 기다리던 일이었다. 속으로 숙원하고 또 기원했던 일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조금은 무게를 잡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가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에는 넉넉하게 생긴 사내가 수염을 날리며 굵은 느티나무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비단옷을 치렁치렁 걸친 모습이며 눈이 부리부리하고 두 턱진 얼굴에 키가 6척은 되어 보이는 것이 상당한 재력가거나 명문가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자초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직하게 말했다.
“귀인께서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오니까?”
자초는 주눅이 들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 같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돌이켜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자존심만큼은 낮추고 싶지 않았다.
“정말 제 앞에 계신분이 진나라 왕손 자초님이 맞사옵니까?”
사내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목소리가 우람한 것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렇사옵니다만…”
자초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러자 사내는 머리를 조아렸다.
“신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장사를 하고 있는 여불위라고 하옵니다.
왕손 자초님을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사옵니다.”
큰 덩치에 걸맞게 참으로 부드럽고 공손하게 그를 대했다.
여불위(呂不韋)는 본래 한나라 사람으로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여러 나라를 돌며 크게 재산을 모은 거상이었다.
그는 한단에 진나라 왕손 자초가 볼모로 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좋은 기회(寄貨)로구나”라며 자초를 찾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남루한 몰골에 적잖게 실망하는 눈빛이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초는 정중히 내실로 그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위엄을 갖추고 하인에게 차를 내오라고 일렀다.
여불위가 공손히 절을 올리자 자초가 어색한 표정으로 맞절을 했다.
“대관절 귀인께서 저를 찾아오신 연유가 무엇이오니까?”
자초는 내심 왕손의 품위가 손상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다짐하며 나직하게 읊조리듯 물었다.
“왕손께서 이토록 누추한 곳에 기거해서야 되겠사옵니까. 정말 놀랐사옵니다. 이럴 수는 없사옵니다.
제가 왕손의 집안을 빛나게 해 드리겠사옵니다.”
여불위는 굵직한 목소리로 선문답하듯 말했다. 자초는 의아했다.
느닷없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말을 되씹으며 말을 던졌다.
“귀인은 그대의 집안을 빛내시고 그 다음에 우리 집안을 빛내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