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사진

2023. 5. 6. 13:43카테고리 없음

결혼식장의 가족들

"자, 이쪽으로 한번 보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자!"

"자, 이쪽으로도 고개를 살짝 돌리며 즐거운 상상!'

카메라맨들이 유도하는대로 아이들은 포즈를 취해가며 촬영을 즐기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 덕에 카메라맨들은 카메라맨들대로 쉴 사이 없이 찍고 또 찍어댔다.

옛날처럼 필름이나 원판을 갈아 끼울 필요도 없으니... 

마냥 찍어대는 거지, 뭐.

 

우리 아이들이 벌써 고등학교 졸업앨범 사진을 준비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간 세월이 쉽게 믿겨지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이곳에서 결혼앨범 사진촬영을 한 것이 19년 전이었단 말이지...

하! 세월이 정말 그렇게 빨리 갔단 말인가.

도끼자루가 썩었어도 두 번은 썩었겠다.



소년이 어릴 때 살던 한내읍에도 물론 사진관이 있었다.

어머니가 하시던 수예점 길 건너편으로 예식장 이층에 사진관은 자리하고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런 행사를 제외하곤 사진 찍는 일이 참 드물다 보니 사진관의 위치가 참 중요했다.

예식장 위에 사진관, 그리고 그 곁엔 또 이발관... ^^

한 번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게끔 이루어진, '한꺼번에 세 마리!' 구조였다. 


어린 소년에겐 예식장 앞에 입간판으로 세워지는 결혼식 일정이 중요했다.

입간판 위엔 하얀 모조지에 검은 먹글씨로 '일요일 몇시' 라는 가로로 쓰고, 그 밑으로는 세로로, '김아무개씨 장남 신랑 김ㅇㅇ', '이아무개씨 차녀 신부 이ㅁㅁ' 쓰여있곤 했다.

그가 김아무개씨를 알든 모르든, 아들 김ㅇㅇ을 알든 모르든...

또 이아무개씨를 알든 모르든, 또 그의 딸 이 ㅁㅁ을 알든 모르든...

그건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요일이 되면, 소년은 아침 일찍 일어나 엄마를 재촉해 부리나케 세수하고 깨끗한 옷으로 잘 차려 입었다.

그리곤 예식장 옆 이발관에 잠시 들러 머리 예쁘게 하이카라해 넘기고 예식장으로 달려가 단상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텅 빈 예식장을 지키곤 했다.

하객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신랑신부측 사람들도 들어오면서 좀더 부산해지면, 그는 제일 앞줄 좌석으로 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어린이의 표정을 하고 단정한 자세로 옮겨앉았다.

거개가 시골사람들이었던 하객이나 친척들은, 제일 앞좌석을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이 하얀 얼굴의 말쑥한 꼬마신사가 단순한 구경꾼이라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려웠으리라.



아, 하지만 단순한 구경꾼 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 오전의 바쁘고 복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아직까지도 딱딱한 의자에 궁뎅이를 찰싹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하나의 목적 때문이었다. 

사진 찍기 위해서... ^^

예식이 끝난 후 찍는 가족 및 친지분들 사진 순서가 타겟이었다.

으례히 어른들은 신랑신부 양옆으로 해서 서너줄로 도열을 하고, 주름상자 앞의 사진사는 친척 중 꼬마아이들을 모아 그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히는 것이 양념처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안면이 있는 (사실 잘 아는...^^) 사진사는 소년을 아이들 사이에 끼워 앉히곤 했다.



사진사는 플래쉬를 든 손을 한껏 높이 쳐들며,

"자, 여기를 보세요~. 하나 둘 셋!"

펑!

마그네슘 화약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방정 맞은 처녀들의 호들갑스런 탄성은 터져나오고.... 

때론 불꽃이 튀어 신부 드레스에 불이 붙는 사고도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결혼식의 백미는 바로 펑!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던 하얀 연기였다.

오늘의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소년에게 사람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념품도 챙겨주곤 했다.

"고놈, 참 멀쑥하게 생겼구나. 이거 하나 가지고 가렴."

플라스틱 쟁반, 바가지, 모찌떡 등등...

플라스틱 쟁반이나 바가지가 처음으로 도입되던 시절이었고, 가볍고 예쁜데다 깨끗하게 닦이는 플라스틱 제품들의 인기는 꽤 좋은 편이었다.

팥앙금이 가득 든 모찌떡이 좋기는 가장 좋았는데, 경우가 잦지 않았던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

(여하간, 혹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사오십년 전 대천지역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식 사진에 아직까지도 도통 누구네 집 아이인지 모르는, 얼굴 허연 놈이 하나 끼어있으면, 아, 그게 유년의 무길도한량이었구나 생각하시길... ^^)

 

세월이 또 몇 해 흐르면, 한내읍 신작로에서 세발자전거 끌며 놀던 소년은 서울 변두리 미아리 눈물고개까지 진출, 재개발 되기 전의 삼양동 산동네에 살게 된다.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꼬리를 물고 붙어선 산동네에도 봄바람이 불고 가을 낙엽은 졌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부도 끝이라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인데 사진이란걸 찍을 기회가 있었을까 마는...



그 달동네에도 사진사는 찾아왔다.

아무도 사먹지 않을 것 같은 보리 냉차, 수박 냉차 아저씨들이 자전거를 끌고 왔듯이, 사진사 아저씨도 땀을 뻘뻘 흘리며 배경 스크린에 바퀴를 달고 밀고 밀어 산동네로 올라왔다.

빗줄기에 패인 길에 작은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머뭇거리며 올라왔다.

목에 매달린 접이식 휴대용 주름상자 카메라가 그를 따라 앞뒤로 그네를 탔다.


배경 스크린엔 창경원의 아름다운 전각 풍경에 멀리 창경원 케이블카를 어우러지게 그린 것도 있었고, 남산 케이블카를 중심으로 남산의 숲을 그린 것도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 서울의 중심 관광지들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

스크린 앞에는 조그만 의자 두어개를 놓고 또 그 앞으로 가짜 꽃바구니들을 늘어놓아, 일종의 작은 무대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배경 스크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으면, 영락없이 그 배경의 장소에서 사진 찍은 듯이 보이는, 그런 원리였다.



모처럼의 사진 찍는 기회인지라, 동네 아이들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곱게 빗은 후 나름 좋은 옷으로 단장을 하고 나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

형제끼리, 오누이끼리, 때론 엄마와 함께, 그리고 때론 언니 동생하며 마음 맞는 엄마들 끼리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치-즈" 니 "김치-" 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은 때라, 웬만해선 카메라 앞에서 웃는 이들이 드물었다.

앙칼지게 찢어진 눈으로 무섭게 쏘아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희망자들의 (아니 사진값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자 라는 표현이 맞겠다) 사진촬영이 끝나면, 주위에 비루 먹은 말 같은 표정으로 둘러선 구경꾼들 중에서 사진사는 선정을 했다.

"어? 아줌마도 사진빨 잘 받겠는데?... 함 올라가봐요."

비싼 사진값 때문에 망설이다가 부추킴을 당하면 마지못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주로 이 부류에 속했다.

못이기는 체 하며 코 찔찔이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의자에 가 앉는 앞집 아줌마.

혼자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후 손으로 턱을 괴어 상념에 잠긴 듯 포옴을 잡아보던 옆방 새댁.

펑! 하는 플래쉬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돈 쏟아지는 소리...

그런 식으로 사진사들은 매상을 더 올리곤 했다.



그날은 그가 소년을 선택했다.

아저씨, 나 돈 없어요.

"괜찮아, 이녀석아. 엄마가 다 내줄꺼니까..."

반대편에서 구경하고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셨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쭈빗쭈빗 하는 무길도한량의 팔을 다짜고짜 잡아 끌어 스크린 앞 의자에 앉히고 마는 사진사.

당혹스러워 하는 엄마의 얼굴 위로 붉은 빛이 점차 번지기 시작했다.

나, 내려갈꺼예요.

사진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소년은 버둥거리고, 주위 사람들은 또 그것이 재밌다고 웃어대고...



"나랑 같이 찍자!"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작은 무대로 뛰어 올라와 소년을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팍에 털썩 앉혀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집주인 석이엄마였다.

석이엄마의 기세에 소년이 찍 소리도 못하고 있는 동안 챤스를 놓치지 않는 사진사의 카메라 플래쉬는 어김없이 터져나가고, 멀리 빨개진 얼굴의 엄마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족을 위해 매일 80원짜리 봉지쌀 한 봉다리씩을 가까스로 마련해오시는 아버지의 노고에 비하면, 사진 한장에 200원은 너무나 큰 사치였다.
사진을 다 찍고 담배 한대를 맛있게 피고난 사진사는 휙- 하니 담배꽁초를 전봇대 밑으로 던지고 산동네를 떠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엄마는 아무 소리 안하시고 소년의 머리를 자꾸만 자꾸만 쓰다듬기만 하셨다.
현명한 소년의 엄마는 그 사진값을 지불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소년과 석이엄마가 같이 찍은 사진도 결국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으리라.
뭐, 지나간 이야깃거리 한 꼭지였다.
아이들은 사진사들의 요구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나왔다.
"아빠, 오늘 우리 둘 사진 찍은 게 900장이 넘는데..."
900장?!!!
우린 그 중 2장만 쓸건데...?
"우리가 나중에 그 중에서 골라야지, 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참 시절이 사람을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 많던 필름카메라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