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24. 19:30ㆍ카테고리 없음
당신의 십팔번(Posted by 장명숙)
당신의 십팔번
조 여사는 늘 마음이 약한 것이 문제였다.
화장품 외판원이었던 젊은 시절 그녀의 십팔번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였다. 그러다가 마흔을 넘어서자 조 여사의 십팔번은 ‘마음 약해서’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십팔번이 바뀐 때는 그녀가 화장품 외판원에서 전도사부인이 된 시기와 이상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 후, 조 여사는 남편을 목사 자리에 앉히더니 찬송가 343장으로 십팔번을 바꾸었다. 목사 사모에게 딱 어울리는 십팔번이었다.
조 여사의 인생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그녀의 십팔번도 세 번을 바뀌었다. 막내딸인 나는 조 여사의 그 노래들을 지겹도록 들으며 자라났고, 시집을 갔고 두 아이를 낳았다.
1.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초등학교 때 나는 우연히 그녀의 첫 번째 십팔번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토요일 오전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었는데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회관 앞 큰길가까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우리 집 마당이었다. 양철대문을 소리 나게 열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 아무도 나를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조 여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녀의 십팔번을 멋들어지게 불러제끼고 있었다.
계모임을 끝낸 듯 술에 취한 아줌마들이 마당 한 가운데에 빙 둘러서서 노래와 춤으로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장구를 오른 쪽 어깨에 걸친 아줌마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굿거리장단을 신나게 매기고 있었다. 마루에 가방을 내려놓고 난 엄마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마침 그녀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의 후렴구를 선창하는 중이었다. 조 여사가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라고 부르자 나머지 아줌마들이 동시에 ‘차차차’ 라고 외쳤다. 바로 뒤를 이어 한 아줌마가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할 때에는 아줌마들이 모두 한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차차차'를 더 크게 외쳤다. 나는 반쯤 얼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들의 쇼를 구경했다. 어깨를 가로질러 장구를 맨 아줌마는 배꼽이 보이는 줄도 모르고 자기만의 흥에 취해 있었다. 흥에 겨워 고개를 좌우로 계속 흔드는 아줌마, 몸을 세게 뒤흔들어 윗도리가 가슴께까지 치켜 올라간 아줌마, 침을 튀기는 열창으로 립스틱이 입가에 벌겋게 번진 아줌마가 한 사람씩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엄마를 보며 이마를 찡그리자 그녀는 술기가 번진 얼굴을 약간 돌려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야, 이년들아! 조용히 못 혀? 대낮부터 넘 부끄럽게 뭔 지랄 발광들이여, 시방!”
회관 앞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지팡이로 대문을 세게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팔순의 욕쟁이 할머니였다. 그녀의 마법의 지팡이가 몇 마디 거친 욕설과 함께 땅바닥을 두 번 내리치자 아줌마들의 동작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 할머니는 활개를 치며 장구를 멘 아줌마에게 맨 먼저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깨에서 장구를 낚아채 장독가에 휙 내던져버렸다. "날이 궂을라나, 집에 가 비설거지나 혀, 이것들아." 까만 먹장구름이 하늘에 우우 몰려들고 있었다. 그녀들의 쇼는 그대로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욕쟁이 할머니의 퇴장과 함께 아줌마들은 웅성거리며 둥글게 모여섰다. 장구장단이 트로트 박자를 타기 시작하더니 아줌마들의 목청은 하늘을 찔렀다.
"늙어지면 못 노나니 만화방창 사시절에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차차차)."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려지고 있었다. 화장품 판매원 조 여사는 배고픈 막내딸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난 마루 한쪽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다가 천천히 부엌으로 건너갔다. 불 꺼진 연탄아궁이에는 엊저녁에 끓여둔 김치콩나물국이 냄비에 절반쯤 차올라 있었다. 초여름 더위에 시큼해진 김칫국에 찬밥 한 덩이를 말아, 선 채로 뱃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점심을 먹고 찬장에 있던 오이를 반으로 뚝 잘라 입에 물고 마당으로 나왔다.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밥 먹은 그릇을 닦았다. 그때까지도 엄마는 마루 한가운데 이 차로 막걸리 판을 벌려 놓고 있었다.
“아, 이거 되게 안 나오네.”
조 여사는 변비환자가 항문에 힘을 주듯 화장품 크림 샘플을 안간힘을 다해 쥐어짜며 말했다. 공짜로 딸려 나오는 기초 화장품 샘플을 큰 화장품 용기에 덜어 사용하면서 조 여사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 로션 샘플 12개면 큰 로션 한 병이 나온다니까.”
그 얘기를 하면서 안경을 치켜 올릴 때 보면 조 여사는 꼭 수학 선생님 같았다. 다 짜고 버린 작은 화장품 용기를 빨간 플라스틱 대야에 굴리며 놀고 있던 나에게 조 여사는 말했다.
“넌 공무원 각시나 되라. 월말이면 외상값 착착 잘 갚는 것들은 공무원 각시들뿐이더라.”
난 엄마의 말에 늘 고개를 끄덕였다.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듯 나또한 공무원에게 시집가야 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젊은 시절 화장품 판매사원 1위로 이름을 날린 엄마는 일명 악바리였다. 술집 아가씨들 외상값을 다른 아줌마 사원들은 곧잘 떼먹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엄마는 나름의 비법으로 그 외상값들을 잘도 수금했다. 언젠가 전화통화에서 난 엄마의 비법을 엿듣게 되었다.
“술집 년들 구슬리려고 공짜로 마사지깨나 해줬지. 손가락 지문이 다 닳았을 정도라니까!” 하면서 조 여사는 무슨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손가락을 쫙 펼쳐보였다.
언젠가 엄마와 친한 한복집 친구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녀의 새로운 무용담을 전해 듣게 되었다.
“한번은 샘물다방 미스 리가 화장품값을 몽땅 떼먹고 도망을 간 거야. 미스 리가 어디로 옮겨 갔는지 우연히 알게 됐어. 내가 어디 가만있을 사람이야. 당장 그 술집으로 쳐들어갔지. 장사준비가 한창 일 때 그 가게 문턱에 배 깔고 누워버렸어. 세 시간을 그렇게 버티니까 그만 좀 나가달라고 하면서 술집마담이 미스 리 외상값을 대신 다 갚아주더라니까,”
조 여사는 그날 화장품값으로 십오 만원을 수금해 나오면서 한 달 넘게 생리를 걸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하필 술집가게 문턱에 누워 막무가내로 버티던 그 때 막내인 나를 임신 중이었다는 것이다.
조 여사가 화장품 판매사원 시절 최고로 이름값을 올릴 때였다. 어느 날 내 손에 용돈으로 자그마치 천원을 쥐어준 일이 있었다. 나는 그걸 친구들에게 자랑한답시고 가지고 나가 회관에서 종일 놀다가 그만 천 원을 잃어버렸다. 같이 놀던 오빠는 맨 먼저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엄마가 준 돈 천원을 가지고 놀다가 홀랑 잃어버렸다고 말이다. 그즈음 할머니는 마당 텃밭에 상추와 채소를 가꿔 시장에 내다 팔아 반찬값을 벌었다. 그 일로 조 여사는 온종일 할머니의 지청구에 시달려야 했다. 철모르는 어린 것한테 애당초 그렇게 큰돈을 쥐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린 손자들을 맡아 키우며 집안 살림까지 해야 했던 할머니는 그 일 이후 속상할 때면 ‘철없는 지 딸년 용돈을 천 원이나 줘 잃어먹게 하다니······.“ 하면서 늘 투덜거렸다.
조 여사는 ‘젊어서 노세.’ 라는 당신의 십팔번과는 반대로 제대로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하고 삼십대 중반을 흘러와 버렸다. 물론 직장을 옮겨 다녔던 불안정한 아빠의 직업과 불안한 가정 경제가 그 이유였겠지만 조 여사 스스로도 집안일에 별 보람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질기고 독한 조 여사의 성품을 나는 그대로 물려받았다. 대학교 때 남자 친구와 외박을 하고 온 뒷날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녀가 대뜸 몽둥이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조 여사의 몽둥이 끝을 붙잡고 팔에 최대한 힘을 주어 끝까지 버텼다. 그냥 그때 몽둥이로 몇 대 맞고 말걸, 조 여사는 힘에 부쳤는지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내가 호랑이 새끼를 다 키웠네.”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엉엉 운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할머니를 냉대하는 그녀 앞에서 난 할머니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그러자 엄마는 내 뒤통수를 향해 “독한 년” 이라고 했던 기억도 아련하다.
2. 마음 약해서
아빠가 16년 동안의 국어선생님과 3년의 군청 서기 일, 6개월간의 월부책 장사 따윌 그만 두고 시골 전도사로 부임해 갔을 때 조 여사는 화장품 외판원을 여전히 그만 두지 못하고 있었다. 다섯 남매를 죄다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엔 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릴 때였다. 조 여사는 시골로 전도사생활을 하러 교회에 들어가신 아빠를 따라가지 않고 할머니와 함께 집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일주일에 한번, 주일날 반찬거리와 아빠의 속옷을 챙겨 시골교회에 다녀올 뿐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월급을 고스란히 서울 신학대학교 학비와 차비로 써버렸고 자식들은 오로지 조 여사의 화장품판매가 잘 되길 기도했다.
내가 여고에 막 입학했을 때 어느 휴일, 조여사가 별안간 지리산을 다녀오자고 했다. 바로 위의 오빠가 인근 시내 고등학교기숙사에 머물고 있던 때라 집에는 할머니와 나, 그리고 엄마뿐이었다. 나는 엄마와의 둘만의 산행에서 우연찮게 조 여사의 십팔번을 두 번 씩이나 듣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노고단 정상에서 챙겨간 점심을 달게 먹고 일어난 우리는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했다. 피아골로 넘어가는 반야봉 길목에 이르자 누군가 나무에 막걸리 한 통을 대롱대롱 매달아놓고 간 게 눈에 띄었다. 점심을 먹고 챙겨간 물을 다 마셔 버린 데다 한 낮 더위에 목도 말라 나는 막걸리를 음료수 삼아 먹고 내려가자고 조 여사를 꼬드겼다.
막걸리 한 통을 모녀가 사이좋게 나눠먹고 둘은 갈 길을 재촉했다. 취기가 오른 여고생 딸년은 그때 한창 유행하던 나미의 ‘빙글빙글’을 흥얼거리며 신나게 산을 내려갔다. 노래 가사대로 정말 ‘어떡해 하나?’를 부를 땐 산길이 빙글빙글 돌아 발을 여러 번 헛디딜 뻔 했다. 엄마는 내 노래가 끝나자 전도사부인에게 어울리는 찬송가가 아닌 ‘마음 약해서’를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했다. 하긴 젊어서 십팔번이었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를 엄마가 부르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차차차 하면서 후렴구로 장단을 맞춰주기엔 산길도 무척 가팔랐고, 지친 체력에 무리가 따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사십을 넘긴 그녀의 십팔번은 어느새 ‘마음 약해서’로 바뀌어 있었다.
“마음 약해서 잡질 못했네, 돌아서는 그 사람. 혼자 남으니 쓸쓸하네요. 내 마음 허전하네요.” 조 여사의 십팔번이 지리산 자락에 메아리로 울러 퍼졌다. 난 엄마의 노랫가락이 늘어지려고 할 때마다 장난기가 발동해 노래 중간 중간에 ‘짜라짠짠짠짠’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자 딸의 응원을 힘입은 조 여사는 두 번째 ‘마음 약해서’를 부를 때는 먼젓번보다 목소리를 크게 해 부르는 것이었다. 옆에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산을 거의 내려와 도착한 한적한 시골에선 어느새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간이 정류소에 이르러 물어보니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막 출발해 버렸다고 했다. 막차 시간까지는 40분이나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정류소 옆 작은 가게에서 잠깐 쉬며 컵라면과 어묵으로 시장기를 달랬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조 여사는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나에게 그냥 읍까지 걸어가 보자고 했다. 그녀와 나는 걸어가다가 아스팔트에서 만난 막차를 그냥 돌려보냈다. 인심 좋은 기사는 공짜로 태워줄테니 타려면 타라고 외쳤지만 엄마와 나는 친절하게 사양하며 그 밤, 걸어서 읍내 집에 도착했다. 집에 와 보니 발가락이 부르트고 물집이 군데군데 잡혀 살갗이 쓰라렸다. 찬물에 후다닥 발만 대충 싣고는 엄마와 나는 피곤에 지쳐 잠들어버렸다.
그 시절 조 여사는 매주 일요일이면 아빠가 있는 시골에 첫차를 타고 나가 반찬과 옷가지를 가져다 날랐다. 그 전날 미리 장을 봐서 노인들이 대부분인 시골 교인들의 점심을 대접 하고 읍내 집으로 돌아올 적도 있었다. 한 달이 지나자 엄마는 시골 가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그즈음 아빠가 머물던 교회 사택에 못 보던 반찬 가짓수가 늘어나고 교회 마당이 말끔히 청소되어 있더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홀로 된 어느 여자 집사님이 아버지를 끔찍이 따르고 위한다는 것이었다. 조 여사는 매 주 버스 타는 차비와 수고를 덜었다며 꽤 통 크게 나왔다. 그러면서 “어디 네 아빠가 바람 필 위인이냐?” 며 내 앞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아빠 주위를 맴돌던 우렁 각시는 교회 인근에 살던 과부 집사님으로 밝혀졌고 그 분은 훗날 목사사모가 되어 시골교회에 정착한 조 여사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3. 울어도 못 하네-찬송가 343장
조 여사는 결국 남편을 목사 안수를 받게 하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하고 시골교회로 간단한 살림살이를 챙겨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 아빠를 혼자 두면 안 된다는 할머니의 잔소리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그녀가 시골 교회로 들어가던 날 엄마는 내게 “동네 슈퍼아줌마에게 잘 말해뒀으니 반찬 떨어지면 외상으로라도 갖다 먹어.”라고 말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막상 엄마가 떠난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의기소침해 하면서도 속으로는 아주 홀가분해하고 있었다.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는 대학생활의 자유와 해방감을 맘껏 누릴 수 있으리라, 가끔 외박을 감행해도 되리라 생각하며 속으로 휘파람을 불고 있는데 엄마는 내게 “외박은 절대 금물이야!”라고 따끔하게 경고했다. 아무튼 조 여사가 화장품 판매를 그만두고 시골교회사택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은 가족 모두에게 잘 된 일이었다.
당시 아빠 교회는 s시의 한 교회에서 몇 십 만원씩을 선교비로 부쳐와 교회 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교회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자 조 여사는 읍내 자동차 학원을 등록하더니 한 달반 만에 2종 보통면허를 따서 교회차로 교인들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봉고차를 샀어야 하느니 어쩌니 교인들은 말이 많았지만, 조 여사는 꿋꿋이 중형차로 주일이면 그들을 실어 날랐다. 가끔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에 시장을 보러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병약한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여장부처럼 교회의 온갖 궂은일이며 경조사를 챙기기에 바빴다. 한번은 장날 그녀가 읍내에서 생선을 잔뜩 사서 오토바이에 싣고 섬진강 다리를 건너오다 빗길에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병원에 실려 간 그녀를 대신해 교인들이 오토바이와 생선을 수습해 일요일 날 점심으로 생선찌개를 해먹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아무튼 조 여사는 시골 생활에 나름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교회 앞 분교에 화단을 가꾸어 토마토, 가지, 고추, 호박 따위를 심었다. 여름이면 아침마다 아빠에게 신선한 토마토 쥬스를 제공했다. 교회 앞 공터에는 사철나무와 채송화, 봉숭아 따윌 심어 예쁘게 화단을 가꾸기도 했다.
나는 매주일 아빠를 도와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대학생이었던 나를 교인들은 ‘장 선생, 장 선생’ 하며 반겼다. 매 주 시골교회 가는 버스에 오르면 눈이 맑은 산골 아이들을 만나 뭔가 나누고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차고 설렜다.
어느 토요일, 시골 교회로 가는 막차를 타고 하루 일찍 교회를 찾은 적이 있었다. 사택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예배당에 들르려고 하는 데 교회 안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 여사의 세 번째 십팔번은 우연찮게 내 귀에 들려왔다. 찬송가로 들리는 그 노래는 타령조에 약간의 울음기가 섞여들고 있었다. 하필이면 제목도 ‘울어도 못하네.’ 였다.
“울어도 못 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 하네, 힘써도 못 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 조 여사의 서글픈 찬송가 소리는 교회 시멘트 담벼락을 타고 내 귀에 흘러 들어왔다. 그런데 후렴구는 생략한 채 1절부터 4절까지 다 부를 셈인지 계속 같은 소절만 반복되고 있었다. 역시 무슨 일이든 한꺼번에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조 여사다웠다. 찬송가 소리가 끝도 없이 계속되자 나는 호기심에 교회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그녀모습을 지켜보았다. 조 여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주먹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내리치며 찬송가를 군가 부르듯 하고 있었다. 환갑이 다 된 그녀의 목청은 여전히 크고 우렁찼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데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조 여사가 죽고 난 뒤 발견된 그녀의 가계부 한 구석엔 검은 볼펜으로 이런 글이 휘갈겨져 있었다. “내가 교회 사모랍시고 첩첩 산골 OO교회로 들어왔지만 난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라서 마땅히 정 붙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산으로 밭으로, 교인들 들일하는 데 가서 일해주고 산으로 밤 줍고 버섯 따러 다니면서 어떻게든 정을 붙이고 살았다. 이곳 산은 전부 밤 산이라 매년 봄이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동네 뒷산으로 주인 없는 밤나무만 골라 쥐 밤을 줍고 송이버섯 따고 고사리 끊는 재미가 좋았다. 교회 앞 분교에는 화단에 가지며 호박, 토마토를 심어 가꿔놓으니 사시장철 반찬거리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수확이 있었다. 다만 얘들 아부지 지병이 있어 목사노릇 몇 년이나 할지 장담할 수 없고 믿음 없는 목사 사모노릇을 언제까지 잘 해낼 수 있을런가 그것이 걱정이다.” 난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녀의 메모를 접하면서 교회 사모로서의 삶이 그녀에게 평안을 가져다 준건 아니구나 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지병이 있었던 아빠보다 3년이나 일찍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환갑을 넘긴 이듬해 오빠를 결혼 시킨 후 그녀는 대장암말기 환자로 생을 마감했다. 찬송가 ‘울어도 못하네’를 비장하고 한탄스럽게 불러제끼더니 그녀 자신 스스로가 미리 닥쳐올 운명을 예감했는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진 애를 써서 아빠를 목사자리에 앉히더니 뭐가 그리 급했는지 병약한 아빠만 교회에 홀로 남겨 둔 채 그녀는 서둘러 하늘나라로 갔다. 가끔 나는 교회에서 우연찮게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어 ‘울어도 못하네’를 한없이 부르던 조 여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4. 당신의 십팔번
누군가 내게 당신의 십팔번을 물어온다면 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마음 약해서’를 제 1순위로 꼽는다.
언젠가 시어머니 생신 때 2차로 가족끼리 노래방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부른 곡이 ‘마음 약해서’였다. 전곡은 시어머님 담당이었고 노래 가락이 늘어지려고 폼을 잡을 때면 중간 중간 ‘짜라짠짠짠짠’으로 추임새를 넣는 것은 내 담당이었다. 시어머님과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좋은 날 나는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막내 며느리가 당신 옆에서 노래를 거들며 즐겁게 추임새를 넣는 게 기분이 좋았는지 시어머니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마음 약해서어, 잡지 못했네. 돌아서는 그 사람 (짜라짠짠짠짠)
혼자 남으니이, 쓸쓸하네요. 내 마음 허전하네요. (짜라짠짠짠짠)“
조 여사의 십팔번을 그날 시어머님과 부르면서 나는 지리산 골짜기에 울려 퍼지던 조 여사의 노랫가락을 떠올렸다. 울긋불긋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부르던 당신의 십팔번을 말이다.
조 여사가 나에게 남긴 건 쓸쓸한 당신의 십팔번뿐이었다. 그녀가 화장품 외판원으로, 전도사 부인으로, 목사 사모로서의 세 번의 굵직굵직한 인생의 변화를 겪을 때 함께 했던 노래들이 아직도 내 귀엔 쟁쟁하다.
조 여사는 늘 마음이 약한 게 흠이었다. 그녀가 시골교회로 들어가기 전날 밤 나와 베개 머리맡에서 했던 이야기가 뒤늦게 떠오른다.
“막둥아, 힘들어도 그때가 좋았어야. 화장품 가방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던 그 때 말야. 화장품 다 팔고 나면 김칫거리 한단 돼지고기 두어 근 자전거 뒷칸에 싣고 돌아와 너희들 저녁 맛나게 해 먹이던 그 시절 말이야. 니는 얼매나 먹성이 좋았든지 오빠 것 많이 뺏어 묵었제. 중학교 들어갈 때 꺼정 오빠보다 덩치도 크고 키도 훨씬 컸응께.”
“또, 또 그 소리.”
새침한 듯 내가 눈을 흘기자 조 여사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허긴 그때야 다들 묵고 살기만도 바쁠 때였지. 화장품 판매사원 시절 참 말도 많았어야. 선생 각시가 되 가지구 집집이 화장품이나 팔러 다닌다고, 하긴 속도 모르는 남의 말이 뭐가 중요해? 우리 식구들 등 따숩고 배불리 먹었음 됐제, 안 그래?”
난 조 여사의 말에 어린 시절의 버릇 그대로 말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막둥아, 니도 결혼해서 애 낳고 살어 봐야 엄마 속 알 것이다. 참, 내일 부턴 엄마가 교회로 들어갈 것인데 할머니하구 밥 해 먹구 잘 살 자신은 있는겨?”
난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그냥 잠든 척 했다. ‘조 여사, 당신 걱정이나 하세요!’ 라고 대꾸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조 여사는 안방 불을 끄고도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였다. 그날 밤 엄마가 잠든 뒤 난 베개 맡에 소리 없는 눈물자국을 여러 번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