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특전사 하사관 시험
이거다, 그렇다
하늘을 한번 날아보자
단 몇 달 만에 서울로 다시 복귀하는 심정은, 청운의 꿈에 부풀어 내려갈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큰형 집에 들르지도 않고, 작은형에게 짧은 전화를 했다. 작은형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어머니께는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 약이 되고 독이 되고 또 상처로 남으리라.
사정은 서울 친구들도 비슷했다. 믿었던 영석이는 효창동 고시원으로 들어가 칼을 갈았고, 귀곤이는 방위병으로, 만덕이는 가까운 서대문파 친구들과 빈둥거리고 있었다. 정동교회 배움의집 3기 출신으로 그 해에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약간 안도했으나, 당장 눈앞에 떨어진 불이 급했다. 이 몰골로 돈암동 가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흔아홉 마리 염소떼보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예수처럼, 아저씨와 재홍이 형은 반갑게 맞아 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똥고집 부려가며 큰소리 치고 나온 만큼 떳떳한 입장이 되었을 때 찾아가자.
친구들과 어울려 칠장이 남수를 따라 잡부 생활도 하고, 병환이를 등에 업고 신사동 네거리를 쳐들어가 토박이를 몰아내고 구두를 닦았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만덕이를 꼬여 무작정 무전여행을 하면서 민폐를 끼치고, 남수 봉고를 타고 영배랑 동해안 일주를 해도 막막하기만 했다. 이러다가 정말 꽃이 피고 새가 울기 시작하면 영락없이 여름이 올 것이고 머리 빡빡 밀고 입영열차 타면 모든 게 끝이다. 술로도, 담배로도, 없는 돈으로 여자를 산다 해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늘 그렇지만 삶은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엉뚱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응암동 산꼭대기 남수네 집에서 밥과 술과 교통비를 뜯어내어 나오다가 우연찮게 파출소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검푸른 얼룩무늬 제복에 검은 베레모, 노란 계급장을 단 늠름한 군인 뒤로 돌고래 닮은, 독수리 닮은 헬리콥터에서 무수하게 많은 제복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공수 특전사 하사관 모집 광고가 눈에 띄었다.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이거다, 그렇다, 하늘을 한 번 날아보자. 사내로 태어났다면 어차피 한 번은 치르고 넘어가야 할 일 아닌가. 돈 있고 빽 있고 권력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라도(멀쩡한 사람 칼로 수술까지 해 가며) 빠져나가지 못해 더러운 수작을 부렸지만, 나같이 몸뚱이 하나로 버틴 청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나온다면 약간의 몫돈도 쥘 수 있을 테니, 그 때 다시 공부를 시작해 보자.
1981년 봄에 징집 영장이 나왔다. 그 때까지 소총 부대 졸병으로 박박 기는 장면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고 나아가 우수한 인재에 대한 능멸이라고 으스대며 촐싹거렸던,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미성숙아였기에 우연히 만난 파출소 공보 게시판을 통해 공수특전 하사관 시험을 보게 된 일도 순전히 겉멋만 잔뜩 든 철부지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렇게 싫어한 수학 과목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국어·영어·국사·일반 상식 네 과목을 눈 돌림 없이 당당하게 써내고 맨 먼저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합격이었다. 특공 무술 유단자에다 산 뱀을 찢어 먹고 검은 베레모에 숯검댕을 얼굴에 칠하고 적 후방 깊숙이 고공 침투해 단 한번 공격으로 적의 심장부를 폭파, 장교로 특별 진급하고 무공 훈장을 받아내는 국군 홍보 영화의 주인공을 수십 번 꿈꾸었던 내 꿈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으니,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