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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황진이

칸추리보이 2023. 6. 7. 18:01

황진이

화담계곡에 가을이 깊었다.

물은 더욱 짙은 청색으로 바뀌어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산방앞의 은행나무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때마다 누렇게 물든잎을 안타깝게 떨구고 있었다. 은행나무잎이 한두개 남아 있을 때였다. 

은행나무에 기대선 한 여인을 발견 하였다. 여인은 산방을 등진채 계곡을 향해 서 있었다.
서럽디 서러운 저녁노을처럼 짙은 자줏빛치마가 간혹 불어오는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었다. 

화담산방에 여인이라.. 묘한 일이었다. 그것도 여염집 여자같지 않게 화려한 차람의 여인이...
궁금증을 참지못한 학동이 곁눈질을 했다가 화들짝 놀라면서 곁에있는 친구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여보게 송도삼절 황진일세  그때 그 여인이
여보세요 여기가 화담산방이 맞나요? 하고 묻는 그여인은 과연 천하 일색이라고 불릴만한 미인 이었다. 

당돌하게 뭇 남자를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꼬리는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가느다란 눈섶은 말 그대로 초승달이었다. 

진분홍빛으로 빛나는 입술이며 발그레한 뺨, 나무를 짚고 선 길고 가는 손가락까지 솜씨좋은 석공이 빚어놓은 작품 같았다.
맞습니다.
화담선생님을 뵈올려면 어떻게 해야지요?
목소리까지 이른 아침의 꾀꼬리를 닮은듯,높디높은 창공으로 솟구치는 종달새를 닮은듯 맑고 투명했다.
지금 산방에 계십니다.
학인들의 눈이 모두 황진이의 거동에 쏠렸다. 

그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황진이는 치마꼬리를 사려쥐고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깃털처럼 가벼운 황진이의 걸음걸이에 은행잎 바스러지는 소리만 가을 햇살에 저물어가는 산을 울렸다.
학인들 모두가 황진이의 뒷자태만 넋을 잃고 응시했다. 문닫힌 산방 앞에서 황진이는 두어번 헛기침을 했다
뉘시요?
소저 황진이라고 합니다.
산방에만 묻혀사는 화담이지만 그 유명한 황진이의 이름을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화담의 대답은 태연하다 못해 쌀쌀했다. 
무슨 일이시요?
선생님의 고명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들어오시오.
황진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거침없이 산방으로 들어갔다.
황진이가 산방으로 들어가자 학인들의 입방아가 시작되었다.
여보게 저 여인이 지족선사를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나보이. 우리 스승님까지 황진이의 덫에 걸려 들었구먼.
아닐세 이번에는 황진이가 참패를 당할걸세.
천만의 말씀 40년간 수도에 정진했다는 지족선사도 황진이한테 무너지고 말았네. 저 고운 자태를 보게나.더욱이 황진인 글에도 웬만한 선비보다도 능하다 하지 않았나?
지족선사야 있는걸 무조건 부정했던 사람아닌가? 있는걸 없다고 눈감았으니 사실을 알았을땐 넘어갈수밖에 없었지.그러나 스승님은 다르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우주의 기이며 그 기의 결합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는걸 누누히 말해오지 않으셨나. 분명히 그 기의 쓰임새도 잘 아실걸세.
이론이야 어찌됐든 스승님도 남자가 아닌가. 생명을 가진 남자라면 저만한 여자앞에서 어찌 태연할수 있는가. 한양의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황진이와 하룻밤을 갖지못해서 안달이 아니라던가.
여태까지 공부는 무엇하러 했는가. 단지 알기위해 공부를 한건 아닐세. 앎으로 변화하는 것이 진리를 깨치는 이유가 아닌가. 만일 스승님이 황진이에게 무릎을 꿇으신다면 나는 당장 산방을 나가겠네. 나는 스승님을 믿네.
여보게 우리 내기를 하세.지는 쪽이 술한잔을 내기로 함세.

선생님께서는 기로써 세상이 움직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의 연정도 다 기라고 할수 있습니까. 
화담은 황진이의 가시돋친 말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했다.
그럼 남녀가 서로를 찾는것은 부끄러울게 없는 일입니까?
물론일세, 남녀의 만남이 있고 나서야 사람이 생기지 않는가. 그걸 어지 부끄럽다 하겠는가?
그럼 선생님 저를 안아 주십시요. 저는 선생님과 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황진이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애원하듯 화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담의 얼굴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화담은 오래된 고목처럼 허공만 바라보았다.    
여보게 자넨 소문이야 언제나 부풀게 마련이지만 자네는 소문보다 못한 모양일세.  황진이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새초롬하게 토라진 얼굴이 더욱 매혹적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음을 들여다 보게. 남녀의 교접이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닐세. 태어난 생명이 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건 이미 생명이 아닐세. 자신의 기를 이세상의 이치에 맞도록 잘 운용하는것이 각자의 일이네.
그런데 자네는 자네의 소중한 기를 쓸모없는 일에 버리고 있구먼..
화담의 뼈있는 말에 황진이는 발딱 일어났다.그리고는 한껒 요염한 자태로 화담을 응시하며 서서히 옷고름을 풀었다. 숱한 남자들이 스쳐 같건만 처녀의 것처럼 수줍은 가슴이 둥그스럼하게 솟아 있었다. 저녁놀이 문풍지를 붉게 물들이고 붉은 노을이 황진이의 살갗을 더 붉게 비추었다.  황진이는 부러질듯 가느다란 허리를 틀어 치마끈을 풀었다. 자주색 치마자락이 황진이의 미끈한 다리를 휘감으며 흘러내렸다. 오뉴월 파닥이는 은어처럼 매그럽고 싱싱한 두다리 사이로 은밀하게 숨은 무성한 숲이 화담의 눈앞에 있었다.
선생님 마음대로 하옵소서.
착착 감겨드는 목소리렸지만 황진이의 얼굴에는 자존심을 다친 여자의 숨겨진 발톱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이내 낙담했다. 화담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담담한 눈빛으로 황진이의 맨몸을 바라보며 숨결하나 거칠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남자나, 심지어 지족선사까지도 황진이의 벗은 몸 앞에서는 숨을 몰아쉬지 않았던가. 

그런 남자들을 비웃는것이 황진이의 낙이었다. 그런데 지금 담담하게 앉아있는 화담앞에서는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옷을 벗고 있다는 수치심만이 아니었다.
과연 듣던대로 아름다운 몸일세.  그러나 육신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자네의 아름다운 몸도 얼마 지니지않아 흙으로 돌아가고 말걸세. 왜 거기에 집착하는가?
화담의 말은 점점 매서워지고 있었다. 
그건 그때가서 고민할 일이지요. 무엇하러 누구에게나 닥치는 죽음을 벌써 두려워 합니까. 

모든 남자가 탐내는 몸이옵니다. 선생님은 탐나지 않으십니까?
황진이 그녀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다. 글재주는 있었으나 여자였고 더욱이 몸을 파는 기녀였다. 

아무리 시를 읊어봐야 기생의 신분이 달라지는것이 아니었다. 

내노라하는 양반들을 발아래 엎드리게 하는건 실상 황진이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한 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허허 정 그대의 생각이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보았네. 그대같이 영특한 사람이 어찌 그걸 모르는가. 

어린아이와 노인은 남자가 아닐세. 그저 사람일뿐.
그대의 이름을 듣고 비록 여인이지만 제법 빼어난 기운이 있다고 여겼더니만.........
만일 선생님이 젊으시다면 저를 취하셨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늙었다고 예전의 화담 선생님이 아니시옵니까?
그런데?
잠자고 있는 춘기를 깨우십시요.
허허 춘기를 깨우라고?  허허허
제가 깨워 드리겠습니다.
황진이가 화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동그란 젓가슴이 화담의 코앞에  출렁거렸다. 그리고 빙 한바뀌 돌았다. 

풍만한 엉덩이가 매혹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러나 화담을 표정하나 흐트리지 않았다.
난 아닐세.
황진이는 어찌 수습해야할지 난감했다.  화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한편 오기가 발동했다. 

황진은 화담을 마주하고 앉았다. 산방에 스멀스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몸이 비록 늙어 내 몸으로 자네를 취할수 없지만 내 기로는 자네를 취할수 있으니 그대로 앉아 있게.  

그들은 그 상태로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황진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한껒 제꼈다. 
허리가 움찔움찔 움직이며 황진이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리고 들릴듯 말듯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고운 입술사이로 흘러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학인들은 초조해 했으나 그뿐이었다.  
마침내 황진이는 옷고름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리고 화담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이제 우리의 기氣가 통했으니 이理가 통할 날도 있으리라.
황진이는 학인들을 무시한채 어둠속에서 산방계곡을 내려갔다.